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이신기오로 이힌 (문단 편집) === [[동치(연호)|동치]]중흥 : [[삼두정치]] 속의 [[양무운동]] === 혁흔은 의정왕(議政王)으로 군기대신에 복귀하여 조카 동치제의 섭정으로 군림하였다. 또한 [[증국번]] · [[이홍장]] 등의 한족 관료를 기용하여 [[양무운동]]을 지지하였고, 동치중흥(東治中興)이라 불리는 청조 세력의 일시적 부흥을 실현하였다. 그러나 그 입장을 위협받는 일이 적지 않았다. 특히 서태후가 믿고 황제를 맡긴 사부 우키거리 워신(오제격리 왜인, 烏齊格里 倭仁)은 정통 보수파 유학자[* 국구인 알루트 초치와 함께, 보기 드문 [[몽골]] 출신 진사였다. 하지만 여느 한인들보다도 훨씬 원리주의적으로 [[성리학]]을 맹종했고, 깊은 학식을 바탕으로 많은 한인 유생들에게 존경받았다. ]였는데, 동치제의 양육과 교육에 있어 구시대적 제왕교육에만 골몰하고 양무에 힘쓰는 혁흔과 그 밑에서 일하는 총리아문 관리들을 까내리며 매국노로 매도하는 인물이었고, 서태후는 그런 인물을 갈아치우기는커녕 혁흔을 제어하기에 좋은 도구처럼 쏠쏠하게 써먹었다. 동치 4년(1865년)에 서태후에게 참언했다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려 의정왕의 지위를 박탈당해 실각하지만, 머지 않아 복귀. 동치 12년(1873년)에 동치제가 [[원명원]]의 복원 공사를 발안하자 반대했기 때문에 다음해 동치 13년(1874년)에 동치제에 의해 작위가 강등당할 뻔했지만, 서태후의 주선으로 철회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